워싱턴주를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던 나다. 그런데 오늘 가본 이곳은 처음인 듯한 인상이다. 솔직히 처음은 아니다. 오래 전 일 때문에 온 적도 있고 차를 타고 그냥 지나친 적도 있다. 그런데 그냥 관심 없이 지나간 곳이었다.
그러다 5월 어느 날 다운타운에 사진재료를 구할 일이 있어 딸 아이와 외출을 했다. 날씨도 좋았다. 뭐 화창하게 좋은 날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날이었다. 늘 관심밖에 있던 이곳이 그날따라 눈에 확 들어왔다. 잘 정리된 공원, 처음 본 듯한 박물관, 여유롭게 산책 나온 시민들 등 모든 게 예쁘고 아름답게 보인다. 시애틀에 이런 곳이 있구나! 할 정도로 새롭게 보인다.
그래서 오늘 또 한번 배운다.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단편만 보고 판단하지 말자.
유니온 호수는 늘 개스웍스 공원에서만 보아왔지 반대편에서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오늘 가는 이곳은 개스웍스 공원 반대편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여행은 여행 편식이었던 듯하다. 늘 가본 곳만 그리고 가본 길만 다니다 보니 새로운 곳은 좀 멀리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최종 목적지는 프리몬트다. 프리몬트도 몇 번 가본 곳이지만 늘 길을 잘못 찾아 헤맸다.
그리고 프리몬트는 개스웍스 공원을 거쳐 가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보기로 했다.
사진재료를 구하고 내비를 켜니 길안내를 시작한다. 동행한 딸 아이가 예전엔 어떻게 길을 찾아 다녔는지 신기하단다. 내가 생각해도 그렇다. 지도보고 찾아 다닌 길이 자연스러웠던 게 얼마 전인데 이젠 내비없으면 아무데도 갈 엄두가 나질 않으니 참말로 웃긴 일이다. 다운타운을 빠져 나와 내비가 안내하는 길로 가다 보니 오른쪽 차창으로 넓은 호수와 깨끗한 공원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본 듯한 공원이라 나도 모르게 차를 주차장으로 몰았다.
차를 세우고 공원 쪽으로 걸어갔다. 호수 건너 저 멀리 개스웍스 공원이 보인다. 호수 가까이가 수중비행기 격납고 인듯하다. 몇 대의 수중 비행기가 보이고 한두 대는 이륙 준비를 한다.
호수 가장자리에 예쁜 다리가 보이고 그 다리 건너에 눈에 확 들어오는 건물 그리고 건물엔 역사산업 박물관 이름이 들어온다. 그런데 입장료가 14불이다. 조금은 부담되는 돈이라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공원 주변과 시애틀 다운타운의 건물들이 잘 어우러진 도심 속의 공원인 듯하다. 여기저기 구스의 배설물들이 눈에 띄게 많은 게 조금은 거슬렸지만 공원 분위기는 정말 좋아 보였다.
시애틀 다운타운에서 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유니온 호수를 건너 'Fremont'란 동네가 나온다.
젊은 친구들에겐 꽤나 유명한 곳이다. 이곳을 혹자들은 예술가들의 공화국 또는 프리몬트 인민공화국 이라고 부른단다. 간혹 지나다녀 보긴 했지만 크게 관심을 가지고 돌아 다녀보진 않은 곳이라 같은 시애틀 지역이지만 나에겐 많이 생소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의 관심 정도와는 상관없이 이곳에선 많은 행사들이 매년 이루어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프리몬트 축제다. 정확하진 않지만 매년 6월에 열리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장 행렬 같은 분위기의 축제지만 우리 같은 동양인들에게는 많이 낯선 올 누드로 몸에 바디 페인팅을 하고 자전거 또는 걸어 다니며 축제를 즐기는 조금은 이상한 행사가 벌어진다. 동네 분위기가 조금 다르긴 다르다. 미국이란 곳이 그렇듯이 인공적이지 않고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듯한 조금은 비어 보이는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는 곳이 이곳인 듯하다. 조금은 어설퍼 보이지만 나름대로 특색을 가진 상가나 건물들이 인상적인 곳이기도 하다. 그래도 이곳의 가장 대표적인 곳은 The Center of the Universe 라는 팻말이 있는 곳이다. 왜 이곳이 우주에 중심이라고 했는지 잘 모른다. 그러나 팻말에 표시된 부분은 실질적으로 프리몬트에 있는 여러 설치 미술품과 관광지에 위치를 알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정도는 알 듯 하다.
이곳의 또 하나 유명한 곳이 레닌 동상이 있는 곳이다. 민주주의 나라의 선두격인 미국에 공산주의를 만든 레닌 동상이 있다는 게 조금은 이상하지만 정말 있다.
이 동상은 정말 동구권에 있었던 동상이라 한다. 제작기간이 10년이나 걸린 동상인데 1988년 슬로바키아의 포프라드라는 도시에 세워졌다. 그러다 1년 후인 1989년 체코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동상이 쓰러졌다. 당시 포프라드에 있었던 미국인 루이스 카펜터가 이 쓰러진 레닌 상을 미국으로 옮겨 왔고 임시로 지금의 프리몬트에 세웠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누군가에 의해 빨간색으로 살인(Murder)이란 글씨와 왼손에 피로 물든 듯한 느낌으로 페인트를 칠해놓아 조금은 섬뜩해 보이기도 했다. ‘ 마지막으로 The Rocket 이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세상의 중심’이라고 해놓고 막상 거기에 맞는 트레이드 마크가 없어 궁여지책으로 옮겨다 놓은 게 로켓이라고 한다. 그게 1991년이다.
조금은 억지스러운 면도 없지 않지만 나름대로 동네의 특색을 살리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이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프리몬트에서 가장 유명한 공간이 있다. 트롤이다. 트롤은 스칸디나비아에 전승되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괴물이다. 햇빛을 피해 어두울 때만 나다닐 수 있으며, 특히 어린 아이나 젊은 여자들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나그네들이 지나가면 낚아채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런 트롤이 오로라 브릿지 밑에 있다. 이 다리 밑은 어둡고 음침해서 나쁜 사람들이 많이 모였던 곳이다.
이를 좀 개선하고자 프리몬트 예술위원회가 궁리를 한 끝에 이 곳에 예술품을 설치하기로 했고,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떠도는 전설을 차용해 다리 밑에 트롤을 만들었다. 이 트롤이 만들어진 이후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 나쁜 사람들이 없어지고 지금은 프리몬트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이곳은 주말장으로도 유명하다. 주말이라기보다는 일요장이다. 매주 비가 오나 눈이오나 일요일에 장이 선다. 대부분이 수공예품이나 골동품들이 많다. 프리몬트는 시애틀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