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서산에 가면 원형이 잘 남아있는 읍성이 있다. 바로 해미 읍성이다. 조선 태종 때 축성을 시작해서 세종 때 완성이 되었다고 하며 사적 116호로 지정된 곳이다. 또한 한국 천주교 3대 성지중에 하나라고도하며 박해시기에 1000여 명의 신자들이 잡혀와 고문당하고 순교한 곳이라고 하니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워낙 개인적으로 우리 문화와 역사에 관심이 많다 보니 한국에 와서 주로 다니는 곳이 이런 곳이다. 해미읍성은 한국에 돌아와 얼마 안 된 시간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많이 방문한 곳이 되었다.
주중에 차를 가지고 이동을 하니 막히지도 않아 서울에서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는 곳이다. 넓은 주차장과 잘 정리된 읍성에 모습에 마음까지 정화시키는듯한 장소다. 이곳에서 가장 제눈을 사로잡은 건 위풍당당한 소나무들의 자태 다. 우리 민족의 강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잔뜩 담은듯한 나무들이 이곳을 자주 방문하게 한 듯하다.
지금은 서산 해미 읍성이라고 명칭이 변경되었다고 한다.
아래글은 문화재청 홈페이지 올라온글입니다. 여행에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 17년(1417)부터 세종 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 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 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 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 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댓글